이정동 교수는 혁신조달의 개념을 이야기하기 전에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술정책전문가인 그는 전부터 대한민국 산업계의 정체와 위기, 그리고 그 극복방안을 연구해 왔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의 험난한 여건을 딛고 태어났다. 그리고 출발과 동시에 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이미 대한민국의 잠재성장률은 매년 1%가량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정체되는 대한민국 산업의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단계를 크게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추격 전략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진국의 기술 로드맵을 따라가되, 더 열심히, 더 성실하게 일하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추격자 단계에선 속도가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추월자 또는 선진국 단계에선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속도를 높이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나옵니다. 선진국이 만들어놓은 로드맵이 아니라 우리가 로드맵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문제를 출제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추격에서 선도로, 문제 해결자에서 출제자로 전환해야 할 시점인 거죠.”
개발도상국과 신흥공업국 단계의 대한민국에선 빠른 추격자 전략에 따라 세계시장의 주요제품을 더 빨리, 더 좋은 품질로 만들어내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10위 경제규모의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활로가 필요해졌고, 이제는 속도보다 방향 설정 능력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다. 이정동 교수는 스스로 문제를 출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개념설계 역량’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개념에 따르면 세상에는 라이센서(Licensor)와 라이센시(Licensee)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라이센서는 미래로 나아가야 할 개념을 설계하고 제시한다. 라이센시는 개념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만들면서 성장한다. 라이센서가 환경문제에 입각해서 푸른 미래 개념을 그린다면, 라이센시는 친환경 제품을 내놓는 식이다. 20세기는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편의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시키는 대량생산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는 각종 공산품을 빠르게 세계시장에 내놓으며 대량생산 시대의 라이센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라이센서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정동 교수는 혁신조달이 국가적 방향 전환의 효율적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제 선진국에서 제시한 제품을 더 잘 만드는 전략으론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혁신조달은 기업 또는 혁신생태계의 혁신주체들이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출제하도록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이정동 교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혁신조달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혁신조달은 궁극적으로 정부가 하는 일을 혁신적으로 전환하자는 것입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일입니다. 두 번째는 예산을 투입해서 이를 집행하는 일입니다. 동사무소에서 행정서류 한 장을 출력하는 데부터 고속도로와 같은 국가 기간시설을 건설하는 데까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예산을 집행하는 일입니다. 여기, 서울대학교 안을 둘러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립대학교인 이 학교의 책상과 걸상 하나하나 모두 국민의 세금을 들여 구입한 것입니다. 정부가 직접 물건을 구입하는 데에만 매년 150조가 넘는 예산이 들어갑니다. 정부가 예산을 집행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혁신조달은 기왕이면 기술혁신을 촉발하거나 가속하는 방향으로 예산을 집행하자는 시도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가발전 단계와 맞닿아있기도 합니다.
공공영역에서 정부가 예산을 집행할 때, 기술적 도전이 필요한 문제를 출제하는 기업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혁신조달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은 선진국의 로드맵을 따라가는 대신 새로운 기술적 돌파구를 찾게 될 겁니다. 사회 전반과 산업계에 새로운 솔루션을 찾는 시도가 정착하고 확산되면 우리나라와 기업의 개념설계 역량은 한 단계 높아질 것입니다.”
국가의 조달 시스템이 기업의 발전과 국가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사례가 있을까? 이정동 교수는 컴퓨터의 발전도 공공조달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은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발전한 국가지만 이 과정에서 겪어야 할 고민도 적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인구조사국은 수년 단위로 인구 변화 추이를 조사했는데 국토가 넓고 이민도 많다보니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인구 조사결과의 취합에만 7년이 걸릴 정도였다. 이때 허먼 홀러리스라는 사람이 천공카드 시스템(카드펀처)을 개발했다.
천공카드의 구멍 여부를 통해 인구조사 결과를 빠르게 취합하게 되었고, 빠른 인구 통계를 기반으로 연방정부의 행정능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시스템 개발자인 허먼 홀러리스는 1896년에 Tabulating Machine Company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1911년, 이 회사는 CTR(Computing-Tabulating-Recording Company)로, 1924년에는 다시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정보통신 사회의 기틀이 된 인터넷도 미국의 조달 시스템을 통해 태어났다. 전 세계가 좌우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반목했던 1960년대, 미국 국방부는 중요 군사정보를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한 곳의 철벽 보안요새에 정보를 집중해서 보관하는 중앙 서버 방식을 검토했지만 서버를 분산 배치하는 해법이 제기되었다. 여러 서버에 정보를 보관하고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것이 더 안전하리라는 판단이었다. 관건은 안정적인 네트워크의 구현 여부였다. 네트워크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연구개발 끝에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이 태어났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인구 통계를 낼 수 있을까? 국방 안보정보를 가장 안전하게 지킬 방안은 무엇일까? 둘 다 공공성과 관련한 질문들이다. 구미 선진국은 이렇듯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답을 찾으면서 개념설계 역량을 축적해왔다.
이정동 교수는 정부와 기업의 역할을 구분했다. “질문이 만들어지면 기업은 언제나 답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공공의 시각에서 문제를 출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혁신조달은 공공기관이 공공의 문제 해소에 도움이 될 제품을 구매하는 겁니다. 공공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거죠. 혁신조달을 기업 지원 프로그램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혁신조달을 통해 혁신적인 기술이나 제품을 구매하면, 혁신적인 기업이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핵심은 대한민국의 문제 출제 능력을 강화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이 자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회로 전환하도록 지원하는 거죠.”
세계의 모든 정부가 공공 조달을 활용해서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려고 노력 중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이 고도화하면서 산업과 기술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초연결과 초융합은 대량생산 시대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획일적인 문제를 더 빨리 푸는 능력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우문현답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현문현답의 시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나라가 치열한 국제경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올해 출범한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2조 달러의 국가예산을 대규모 인프라 투자에 투입하는 슈퍼 뉴딜 정책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3,000억 달러가 제조업 부흥 예산인데, 전통적인 기술 수준이 높은 기업을 지원하려는 용도가 아니다. 무너진 제조업은 미국의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는 단순히 제조능력만 높인다고 잃어버린 국가경쟁력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조업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미국은 제조역량 뿐만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혁신역량까지 함께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에 필요한 기술과 제품을 찾는 개념설계 역량, 혁신역량을 강화할 수 있어야 진정한 제조업 부흥이 가능하다. 바이든 정부는 미국의 공공성을 강화해줄 기술 기업을 육성하려고 한다. 보조금이나 연구개발 투자, 교육 훈련 등의 전통적인 산업정책 수단만이 아니라 공공 조달을 통한 정부 역할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추세다. 미국의 모든 학교 버스를 전기 차량으로 교체해서 배터리 기술을 키우려는 시도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도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달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때다. 보도블록을 예로 들어보자. 빠른 추격자 단계나 대량생산 시대에선 평범한 보도블록을 더 저렴하고 튼튼하게 생산할 수 있다면 경쟁력이 확보되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선 보도블록에 대한 개념 정의부터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보도블록을 보행도로를 포장하기 위한 덩어리 구조물로 한정짓는 건 지나간 시각이다. 우리가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고민하면 보도블록에 대한 정의도 달라진다. 산업화의 삭막한 풍경이 문제라면 꽃이 자라는 보도블록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주기적으로 침수 피해가 발생한다면 수분을 흡수해서 저장하는 보도블록으로 수해를 예방할 수 있다. 어떻게 질문을 던지는가에 따라 좋은 보도블록의 개념이 달라진다.
그런데 좋은 제품이라고 시장에서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진 않다. 꽃이 피거나 침수에 대비하는 보도블록은 많은 연구개발비가 투입되거나 소량생산 때문에 초기 가격이 높을 수 있다. 실제 성능을 믿지 못해 구매를 꺼리게 될 수도 있다. 공공조달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다. 공공기관이 먼저 혁신제품을 구매해서 사용하면, 높은 초도 생산비용이 점차 낮아질 수 있다. 공공기관에서 테스트베드 역할을 수행하면 혁신제품의 공신력 향상도 가능하다. 이렇게 혁신제품이 시장을 바꿔놓으면 국가경쟁력도 향상되는 것이다. 미국의 컴퓨터산업은 공공조달 시스템을 통해 세상에 등장했고, 미국이 기술력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데 일조했다. 새로운 질문이 혁신을 낳고, 혁신은 좋은 기술과 제품을 만든다. 하지만 이정동 교수는 좋은 물건이라고 능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조달은 세금으로 운영됩니다. 새롭다고 무조건 세금을 지원해줄 순 없습니다. 질문을 선별할 때 납세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공성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질문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해야 합니다.”
혁신조달은 공공성을 갖춘 혁신제품을 공적 기관에서 구매하는
새로운 제도다. 그렇다면 국가의 경쟁력을 혁신적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조달 예산을 투입해야 할까? “99%의 조달 예산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집행됩니다. 정부가 필요한 제품이나 서비스의 구매는
기존의 조달 정책에 따라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기존의 구매 지침을 따라선 기존에 없던
혁신 제품을 구매할 수 없습니다. 혁신조달은
최저가입찰제와 완전히 다릅니다.
공공성을 갖춘 혁신제품은 비싸더라도 구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시장에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공공기관의 실무진이
구매의향서를 쓸 때 혁신제품을
의무적으로 포함하도록 새로운 지침을
만드는 거죠. 하지만 혁신조달에는 정부 조달 예산의 1%밖에
책정되지 않았습니다. 혁신조달이 정부의 조달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진 않습니다. 혁신은 새로운 질문에서 나옵니다.
혁신조달은 국민이 가장 가려워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찾도록 하자는 접근법의 전환입니다. 2019년 시작부터 혁신조달은 공공 조달 시스템을 혁신하려는 취지로 추진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일하는 방식을 바꿔보자는, 대국민 서비스의 개선책이자 적극행정의 일환이었습니다. 조달청에서 집행하는 예산의 1%로 산업계를 송두리째 혁신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 1% 미만의 예산이, 혁신적으로 길을 찾는 기업의 좌절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공공기관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그 효과는 산업계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기업은 언제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니까요. 1%의 조달 예산으로 기대하는 것은 매기효과입니다. 혁신조달 제도를 통해 산업 생태계가 혁신생태계로 전환하고, 대한민국이 개념설계 역량을 축적하길 기대합니다.”
이정동 교수는 혁신조달 제도를 성공적인 실행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먼저, 공공부문의 문제출제 역량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연구개발비는 연간 100조 원에 이르는데, 정부 비중은 20%가 조금 넘습니다. 75조 이상은 기업에서 지출합니다. 환경을 예로 들면,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환경연구단체가 존재합니다. 솔루션은 기업에서 냅니다. 환경부는 문제를 출제해서 여러 환경단체와 기업이 답을 찾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둘째. 면책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합니다. 혁신조달은 공공기관의 구매 담당자에게 혁신제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지침입니다.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혁신제품을 구매하라는 거죠. 그런데 면책이라는 게 참 애매합니다. 제도적으로 면책의 범위를 구체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쉽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면책이 되고, 어떤 경우엔 책임을 져야 하는지 구체적인 케이스들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케이스들과 시행착오를 면책의 매뉴얼을 만드는 자산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셋째, 대개의 경우 문제는 탑다운 방식으로 출제되고, 솔루션은 보톰업 방식으로 만들어질 겁니다. 이들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지표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와 답이 공공성에 부합하는지, 공급자 제안형 솔루션 가운데 혁신제품 대안들을 선별해내는 평가기준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감대를 넓혀야 합니다. 기업은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중요한지 찾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입니다.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확산되어야 합니다. 공공성에 기초해서 개념 설정 능력을 키우는 혁신조달은 대한민국 사회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물장구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혁신의 작은 성공사례들이 많이 만들어져서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가 크리티컬 매스(변화의 임계점)를 넘어 대한민국의 터닝 포인트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혁신조달은 공공성을 갖춘 혁신제품을 공적 기관에서 구매하는 새로운 제도다. 그렇다면 국가의 경쟁력을 혁신적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조달 예산을 투입해야 할까? “99%의 조달 예산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집행됩니다. 정부가 필요한 제품이나 서비스의 구매는 기존의 조달 정책에 따라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기존의 구매 지침을 따라선 기존에 없던 혁신 제품을 구매할 수 없습니다. 혁신조달은 최저가입찰제와 완전히 다릅니다.
공공성을 갖춘 혁신제품은 비싸더라도 구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시장에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공공기관의 실무진이 구매의향서를 쓸 때 혁신제품을 의무적으로 포함하도록 새로운 지침을 만드는 거죠. 하지만 혁신조달에는 정부 조달 예산의 1%밖에 책정되지 않았습니다. 혁신조달이 정부의 조달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진 않습니다. 혁신은 새로운 질문에서 나옵니다. 혁신조달은 국민이 가장 가려워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찾도록 하자는 접근법의 전환입니다. 2019년 시작부터 혁신조달은 공공 조달 시스템을 혁신하려는 취지로 추진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일하는 방식을 바꿔보자는, 대국민 서비스의 개선책이자 적극행정의 일환이었습니다. 조달청에서 집행하는 예산의 1%로 산업계를 송두리째 혁신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 1% 미만의 예산이, 혁신적으로 길을 찾는 기업의 좌절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공공기관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그 효과는 산업계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기업은 언제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니까요. 1%의 조달 예산으로 기대하는 것은 매기효과입니다. 혁신조달 제도를 통해 산업 생태계가 혁신생태계로 전환하고, 대한민국이 개념설계 역량을 축적하길 기대합니다.”
이정동 교수는 혁신조달 제도를 성공적인 실행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먼저, 공공부문의 문제출제 역량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연구개발비는 연간 100조 원에 이르는데, 정부 비중은 20%가 조금 넘습니다. 75조 이상은 기업에서 지출합니다. 환경을 예로 들면,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환경연구단체가 존재합니다. 솔루션은 기업에서 냅니다. 환경부는 문제를 출제해서 여러 환경단체와 기업이 답을 찾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둘째. 면책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합니다. 혁신조달은 공공기관의 구매 담당자에게 혁신제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지침입니다.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혁신제품을 구매하라는 거죠. 그런데 면책이라는 게 참 애매합니다. 제도적으로 면책의 범위를 구체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쉽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면책이 되고, 어떤 경우엔 책임을 져야 하는지 구체적인 케이스들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케이스들과 시행착오를 면책의 매뉴얼을 만드는 자산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셋째, 대개의 경우 문제는 탑다운 방식으로 출제되고, 솔루션은 보톰업 방식으로 만들어질 겁니다. 이들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지표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와 답이 공공성에 부합하는지, 공급자 제안형 솔루션 가운데 혁신제품 대안들을 선별해내는 평가기준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감대를 넓혀야 합니다. 기업은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중요한지 찾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입니다.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확산되어야 합니다. 공공성에 기초해서 개념 설정 능력을 키우는 혁신조달은 대한민국 사회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물장구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혁신의 작은 성공사례들이 많이 만들어져서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가 크리티컬 매스(변화의 임계점)를 넘어 대한민국의 터닝 포인트가 되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