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보캅>의 주인공 ‘머피’는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를 기계장치로 교체한 사이보그다. 몸의 대부분이 기계장치인 그는 과연 인간일까, 로봇일까? 영화의 결말은 머피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그의 정체성을 딱 잘라 규정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의 신체 기관 가운데 뇌에 최우선 점수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물론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을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순 없다. 그래도 뇌는 신체영역 전체를 관장한다. 의학적으로 특히 연구가치가 높은 기관인 것이다. 노령화가 계속되고 사람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뇌질환 역시 늘어나는 추세이다. 따라서 뇌 연구의 중요성은 가중되고 있다. 그럼에도 뇌는 아직까지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뇌질환의 원인이나 기전 가운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뇌질환 관련 솔루션 전문기업인 뉴로핏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빈준길 대표는 2016년 뇌과학 분야 연구용·의료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인 뉴로핏을 설립했다. 뉴로핏은 10년도 지나지 않아 혁신적인 인공지능 기반 뇌 진단 소프트웨어로 의료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빈준길 대표는 어려서부터 벤처기업인이 꿈이었다. 하지만 의료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학교에선 컴퓨터공학이 전공이었습니다. 그런데 학부 과정 중에 할머니의 치매가 악화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부모님께선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시골로 귀향해서 7년을 보내셨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원 진학과 취업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취업해서 사회경험을 쌓은 후 창업할 것인가, 대학원에서 연구 활동을 한 후 기술 창업할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한 거죠. 석사 과정을 밟기로 결심하고 나니 연구실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할머니의 경험도 있어서, 수리 과학적으로 뇌를 연구하는 뇌파분석 연구실에 관심이 갔습니다. 선배들에게 상의해보니 이쪽 연구가 치매 쪽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 창업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고 스스로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창업은 결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란 것입니다. 치매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일입니다. 치매는 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삶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반드시 풀어야 할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학부에서 배운 컴퓨터공학과 뇌 과학을 연결시킨다면 치매 관련 사업으로 창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치도 있고 기업의 발전 가능성도 있을 테니까요.”
2010년부터 빈준길 대표는 광주과학기술원(GIST)에서 뇌질환을 치료하는 전기적 뇌 자극 시뮬레이션 기반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두피를 통해 뇌에 미세 전류를 흘려 자극을 주는 ‘경두개전기자극’ 치료법에 관심이 있었다. 전기나 자기로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이 치료법의 연구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 여러 다국적 기업에서 적극적으로 연구 중이다.
빈준길 대표는 환자의 뇌가 전기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뮬레이션 하는 기술을 연구했다. MRI(자기공명영상장치) 등에서 얻은 환자의 뇌 영상을 토대로 환자의 뇌 모델을 3D로 제작하고, 뇌 모델에 전류의 흐름이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물리 해석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전기 자극 뇌 치료 설계 기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뇌 모델링 시뮬레이션을 설계하려면 뇌 영상부터 분석해야 합니다. 뇌의 주름 하나까지 놓치지 않아야 하니까 아주 정교하고 비싼 연구용 툴이 필요합니다. 수천에서 1억원을 호가하는 소프트웨어 4~5개가 필요했는데, 작업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하나로 통합한다면 연구 활동을 위해서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ꠗ‘성능까지 강화하면 밥은 먹고 살겠다’는 생각으로 창업에 나섰습니다. 연구실 선배인 김동현 박사도 공동 설립자로 창업에 참여했습니다. 현재 김동현 박사는 뉴로핏의 CTO를 맡고 있습니다.”
뉴로핏이 설립된 해는 2016년이지만 창업기술 연구는 2010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결과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빈준길 대표는 당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창업을 하면서 우리가 가진 요소기술들을 완전히 고도화, 자동화, 초고속화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뇌 구조 분석 알고리즘은 너무 느리고 정교함도 떨어졌습니다. 연산에 실패하기도 하는 등 기술적인 문제가 많았습니다.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하면서 하나의 소프트웨어에 담으려니까 기술적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그런데 알파고로 인해 인공지능 붐이 일어나면서 문제 해결의 길이 열렸습니다. 인공지능을 적용한 기술 가운데 하나로 자율주행 자동차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기술은 도로 위의 다양한 물체들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서 사람과 나무, 차량 등으로 구분하는 겁니다. 이 방법론을 뇌에 적용하면 뇌 영역을 분류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년의 연구개발 끝에 뉴로핏의 첫 번째 뇌구조 분석 소프트웨어가 완성되었다. MRI 영상을 기존의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분할하려면 8~24시간이 결렸다. 분할 데이터를 종합해서 뇌 모델링을 하려면 1~2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뉴로핏의 솔루션인 뉴로핏 테스랩(Neurophet tES LAB)은 모든 과정을 20분 안에 처리할 수 있다. 뉴로핏은 영국 런던에서 열린 뇌 자극 국제전시회인 2018 유로피안 뉴로 컨벤션에 부스를 개설하고 소프트웨어를 공개했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국내 상급 종합병원과 미국 주립대학 연구팀은 제품 출시를 기다렸다는 듯 구입했고, 글로벌 기업에서 기술 제휴 요청이 쇄도했다. 2018년 9월, 필립스는 헬스케어부분 글로벌 스타트업 프로그램에서 뉴로핏의 제품을 2018년 의료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로 선정했다. 뉴로핏은 여의도성모병원, 삼성서울병원과 공동 임상시험을 시작했고, 2020년 8월에는 신제품인 뉴로핏 아쿠아(Neurophet AQUA)를 출시했다. 뇌질환 진단 및 예후 분석 기술을 갖춘 뉴로핏 아쿠아는 치매진단 보조 솔루션으로 국내 의료기기 2등급 품목허가를 받았다.
“뉴로핏 아쿠아는 뇌 MRI를 분석해서 뇌신경의 위축과 백질 변성 등의 상태를 확인하는 소프트웨어입니다. 알츠하이머 등 뇌질환의 대표적인 증세는 뇌신경 위축입니다. 피부도 건조해지면 주름이 생기거나 찢어집니다. 뇌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혈압이나 영양 불균형 등으로 뇌 혈관 건강에 문제가 생기죠. 뇌세포가 구조적으로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 여파로 뇌졸중이 올 수도 있고요. 뇌의 구조를 물리적으로 분석해서 신경 퇴화적 변화를 감지하면 치매 등 뇌질환을 빠르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빈준길 대표는 뉴로핏 아쿠아의 장점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미국에서도 뇌 MRI 분석 소프트웨어를 내놓았는데 우리 제품에 비해 제품의 속도가 떨어지고 연산 실패율도 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뉴로핏은 속도와 정밀도 양면에서 우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동서양인 사이에는 뇌구조 차이도 명확히 있습니다. 동양인의 뇌는 둥글고 서양인은 앞뒤로 깁니다. 서양인을 기준으로 설계한 프로그램으로 뇌 구조를 분석하면 동양인에겐 안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뇌 형태가 다르니까 뇌신경이 위축되어도 그렇지 않다는 결과를 낼 수 있는 거죠. 인종에 따른 뇌 구조 차이도 있기 때문에 뉴로핏은 아시아시장부터 공략할 계획입니다. 게다가 아시아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치매 비중이 높기 때문에 의미가 큰 시장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노령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기 때문에 노인질환의 진단과 치료가 무척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시아시장을 우선 공략하는 한편 미국과 유럽에선 세계적인 기관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차별적 전략을 진행 중입니다. 아시아에선 의료기관에 뉴로핏의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고, 미국과 유럽에선 연구기관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의료기기 회사에서 먼저 뉴로핏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거죠.”
뉴로핏은 혁신제품 스카우터 제도를 통해 조달시장에 진입했다. 뉴로핏의 기술력을 알아본 이는 바이오 메디컬 분야의 전문가인 문세영 혁신제품 스카우터였다. 빈준길 대표는 그를 2018년 스타트업 행사에서 처음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문세영 혁신제품 스카우터님은 이 분야의 투자 전문가라서 뉴로핏 초창기부터 우리 회사의 기술을 파악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2018년 연말에 스타트업 행사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봄에 문세영 스카우터님께서 연락이 와 혁신조달 제도를 소개하고 추천해주셨습니다. 조달청을 통해 공공기관에 제품을 납품하는 조달 시스템에 대해선 어렴풋이 알았지만 혁신조달이란 제도는 몰랐습니다. 국내 영업에 집중하던 시기였는데, 뉴로핏에게 큰 도움이 될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로 돌아와서 혁신조달 제도를 살펴봤습니다. 구매기관 가운데 공공의료원도 있었습니다. 뉴로핏 아쿠아의 특장점은 무엇이며, 어떤 공공성을 갖추었는지, 기대효과는 무엇인지를 담은 계획서를 작성해 문세영 혁신제품 스카우터님께 보냈습니다. 스카우터님께서 이 자료를 분석하고 종합해서 조달청에 추천서를 제출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듯 합니다. 그 후 혁신제품 스카우터들의 추천제품들을 발표하고 평가하는 공개행사가 열렸습니다. 코로나 시기라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참석하진 못했지만 인터넷으로 생방송도 송출했기 때문에 심사위원은 물론 국민들의 채점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난 연말에 뉴로핏 아쿠아는 혁신제품으로 등록될 수 있었습니다. 올해부터 실제 제품 수요가 있는 공공의료원을 찾아다니며 뉴로핏 아쿠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3월에 목포시의료원, 충청남도 서산의료원, 충청남도 천안의료원, 국립중앙의료원 4개 의료원에서 뉴로핏 아쿠아 도입을 조달청에 신청했고, 7월에 공급계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빈준길 대표는 진행 과정에서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이를 납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혁신조달 제도는 정부에서 공공을 위해 비용을 대신 지불해주는 감사한 제도입니다. 심사가 무척 깐깐하지만 국민의 혈세로 진행하는 사업인 만큼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원가 책정방식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뉴로핏의 제품은 석박사급 고급인력을 많이 투입해서 개발한 최첨단 소프트웨어입니다. 의료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병원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 원가와 비교하면 곤란한 게 사실이죠. 그렇다고 우리의 개발 원가를 입증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제도나 행정적 문제라고 할 순 없겠죠. 현실이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래저래 힘든 과정이 없진 않았지만 공공 영역 진출에 큰 의의를 두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뉴로핏은 창업 이후 3년도 되지 않아 전 세계 의료시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매출도 처음의 목표를 훌쩍 넘어섰고 전도도 유망하다. 그런데 공공시장 진입이 뉴로핏에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의료기기 시장은 계속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 척박합니다. 병원이 고가 장비를 구매하기 쉽지 않은 탓입니다. 수도권의 상급종합병원은 어렵게라도 예산을 확보해서 첨단 장비를 구하지만, 지방의 공공의료원 상황은 더욱 열악합니다.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뉴로핏의 솔루션을 구매하긴 쉽지 않은 상황이죠. 뉴로핏도 더 많은 의료기기 시장에 진출해야 합니다. 제품 출시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뉴로핏 제품을 사용하고 의료 환경에 도움 된다는 데이터를 쌓아야 합니다. 그래야 뉴로핏도 기술적으로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환자나 그 가족 상황을 생각하면 지방 소재 의료원 진출의 의의가 더 큽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을 살펴보면 환자들이 과도할 만큼 서울로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치매는 한번 치료하고 끝나는 질병이 아닙니다. 평생 관리해야 하는데 지방에서 서울로 계속 오가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공공의료원에도 훌륭한 의료진이 계십니다. 하지만 전문분야 인력이 채워져 있는 상급종합병원과 달리 공공의료원에선 적은 수의 의료진이 많은 분야를 소화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니까 공공의료원에 오히려 보조용 첨단 솔루션이 필요한 겁니다.”
예산이 부족한 지방 공공의료원이 조달청 예산으로 첨단 의료장비를 구매하면 지역 의료환경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이야기다. 할머니의 치매 악화와 부모님의 귀향을 경험한 빈준길 대표에겐 지역 의료 환경 개선의 사회적 가치가 새삼 중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뇌질환의 의료 행위는 진단, 분석, (치료)설계, 치료의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뉴로핏은 뇌질환의 치료설계를 사업 아이템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사업화를 진행하면서 치료설계를 위한 진단과 분석 소프트웨어의 한계를 확인했고, 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연구용 프로그램으로 먼저 제작한 이 소프트웨어는 기존 제품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한 속도와 정밀도를 보였다. 이제 뉴로핏의 진단 및 분석 소프트웨어는 진단 및 분석 보조용으로 확장되어 뇌질환 의료진과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었다. 빈준길 대표의 목표는 뉴로핏을 치료설계는 물론 뇌 자극을 통한 치료까지 전주기적 뇌질환 의료기기 전문기업으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뉴로핏은 새로운 제품을 계속 출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FDA의 승인을 받은 PET 영상분석 솔루션도 내놓았습니다. 이런 제품도 공공시장에 공급할 수 있으면 공공의료원과 뉴로핏 모두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의료시장에선 새로운 제품의 실제 구매 레퍼런스를 쌓기 쉽지 않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혁신조달 제도는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전문가, 혁신제품 스카우터님께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또, 공공의료 시장에 진출해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사실에도 큰 보람을 느낍니다. 뉴로핏의 올해 목표는 국내 시장에 제품을 많이 보급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치매 분야에서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3년 안에는 아시아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치매 솔루션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뉴로핏은 진단 이외에도 전기자극 임상시험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치료까지 개입해서 뇌질환 개선까지 토털 솔루션을 단기간에 구축하려고 합니다. 우리 기술을 다른 회사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라이선싱 아웃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뇌과학 분야에서 확실한 기술 회사로 도입해서 뇌질환을 해소하는 데 앞장서고 싶습니다.”
빈준길 대표의 각오에서 성장과 도약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뉴로핏이 공공 수요 만족과 혁신 기업 육성 지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혁신제품 스카우팅의 우수 발굴사례로 꼽힐 날이 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