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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생태계의 총체적 변화와
혁신조달

세상을 주도하는 산업이나 기술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합리적 생산능력은 더 이상 경쟁력을 지니지 못하는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산업과 기업, 기술은 지속할 수 없다. 변화는 너무나 전 방위적이고 전폭적이어서, 기업이 고스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공공 영역이 변화에 앞장서며 충격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산업 생태계의 변화에 혁신조달이 앞장서야 하는 이유다.

지금까지의 산업혁명은 잊어야

국가와 기업의 미래는 4차 산업혁명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에 좌우된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이 지향하는 방향을 알면 4차 산업혁명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다. 인류가 산업화한 삶을 살게 된 것은 수백 년도 되지 않은 근래의 일이다. 산업혁명 이전에도 생산 활동은 존재했지만 산업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집 근처에서 먹을거리를 경작하던 농사가, 산과 숲을 밀어낸 대단위 농장에서 진행되는 농업으로 바뀌었다. 공장과 도시가 만들어지고 대량생산의 공업 시스템이 태어났다. 산업은 점점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했다. 2차 산업혁명으로 전기가 증기기관의 자리를 대체했고, 컴퓨터라는 정보처리 장치가 중심이 된 3차 산업혁명이 이어졌다. 산업의 핵심은 생산력이었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얼마나 정교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지가 산업의 경쟁력이었다. 인류는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교하게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합리적’이라고 이해했다. 산업사회의 합리성은 인류에게 풍요로운 삶을 선사했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의 정보처리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세계는 다른 목표를 지향하게 되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거론되는 기술은 인공지능, 빅데이터, 자율주행 자동차, 사물인터넷, 블록체인, 클라우드 컴퓨팅, 3D 프린팅 등 매우 다양하다. 이들은 대량생산을 지향하지 않는다. 3차 산업혁명 시대와는 다른 합리성을 추구한다.

3차 산업혁명을 정보화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보처리기술이 3차 산업혁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보처리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인류는 산업사회에서 추구하던 합리성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질적 풍요가 오히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세계는 지구 환경과의 공존을 추구한다. 대량생산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이 4차 산업혁명의 지향점이다. 단순히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교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이제 경쟁력이 아니다. 환경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공존하는 능력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친환경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은 지속가능성

인류는 1972년에 처음으로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환경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113개 국가, 3개 국제기구, 257개 민간단체가 모여 세계 최초의 국제환경회의를 개최한 해가 1972년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후 환경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었다. 산업화로 숲이 사라지고 공기나 물, 토질이 오염되는 것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라나 민간단체에서 환경오염에 대처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루어졌지만, 이들이 함께 모여 한목소리를 낸 건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다. 스톡홀름 국제환경회의는 인간환경선언을 발표했고, 이는 1973년 환경관계 국제기구인 유엔환경계획기구(UNEP) 창설로 이어졌다. 유엔환경계획기구는 격년으로 회의를 개최하는데, 1992년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환경개발회의(UNCED)가 특히 중요하다.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선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리우선언은 스톡홀름의 인간환경선언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의지를 담아, ‘지속가능한 발전(ESSD; 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을 실현하기 위한 27개의 행동 원칙’을 세부 내용으로 내놓았다.

1987년 유엔환경계획기구는 브룬트란트 보고서에서 ‘지속가능성’을 의제로 처음 상정했는데, ‘지속가능성’과 ‘지속가능발전’은 리우선언 이후 환경 문제의 상징적인 용어가 되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강조는, 지금까지의 발전 방식을 고수하면 인류와 환경 모두 지속될 수 없다는 위기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유엔환경개발회의는 리우선언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 '21세기 지구환경실천강령(Agenda 21)'을 채택했다. 리우선언에는 세계 3대 환경 협정이 담겨있다. 기후변화협정(CO₂ 등 온실가스 감축), 생물 다양성 협정(생태계 보존), 사막화 방지 협정(사막화 방지, 물 문제 해결) 등의 3대 환경 협정은 이후 국가나 기업의 전략 수립에서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가이드라인이 된다.

민간에서는 1989년의 원유 유출 사고가 환경문제를 중요하게 인식시키는 방아쇠가 되었다. 1989년 3월 23일, 석유회사인 엑슨의 발데즈호는 2억 리터의 원유를 싣고 미국 알래스카를 항해하다가 암초에 부딪혔다. 4,200만 리터의 원유가 청정해역에 유출되면서 50만 마리의 바다새와 수백 마리의 바다표범, 100만 마리의 해양생물이 목숨을 잃었고 연어 서식지가 파괴되었다. 피해액은 5억 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환경파괴를 경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손해배상 소송은 19년간 이어졌고, 25억 달러의 징벌적 배상 판결이 났다. 이 사건으로 환경단체인 ‘환경에 책임지는 경제를 위한 연합(CERES: Coalition for Environmentally Responsible Economies)'가 세리즈 원칙 또는 발데즈 원칙이라 부르는 기업의 환경윤리기준을 발표해서, 유엔환경계획기구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97년 세리즈와 유엔환경계획기구는 연구기관인 GRI를 설립했다. GRI는 3~4년 단위로 지속가능성 보고서 가이드라인을 개정하는데, 전 세계의 기업 대부분이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발행하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의 정보처리기술은 세계를 온통 디지털로 바꿔놓았다. 디지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통합성이다.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접점을 찾기 힘든 항목들이 디지털 환경에서는 이진법의 숫자들로 변환하면서 통합 관리되기 시작했다. 리우선언의 기후변화협정(UNFCCC)은 1997년의 교토의정서와 2015년의 파리기후변화협정으로 변화 발전했다. 1972년의 스톡홀름 인간환경선언에서 인류는 환경오염을 막자는 취지에 동의했다. 하지만 국가적 또는 국제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환경오염을 막으려면, 환경 문제에 대한 정량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리우선언부터 파리협정까지 그 기준이 계속 구체화하는 중이다. 파리협정의 핵심은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온도가 2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막겠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파리협정 참가국은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온실가스의 중심에 탄소가 있기 때문에 파리협정 이후 전 세계 기술 개발의 중심에는 반드시 탄소가 놓이게 되었다. 선진국의 의무만을 담은 교토의정서와 달리 파리협정에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하기 때문에 탄소저감 또는 탄소중립 기술이 곧 국가경쟁력이 된다. 산업혁명 이후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교하게 제품을 생산하는 능력은 이제 핵심경쟁력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의 총아로 각광받던 기술과 연료, 제품이 이제는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로 바뀌어버렸다.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신재생에너지 또는 안전성을 확보한 원자력에너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자동차산업에서 내연기관이 퇴출되고 전기차 중심으로 재편된다. 자동차산업의 핵심도 엔진에서 배터리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많은 탄소를 배출하던 제철산업도 탄소포집 기술을 도입하는 등 완전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가장 각광받은 물질을 플라스틱일 것이다. 옷감이나 비닐봉지처럼 연한 재질부터 건축재로 사용하는 강화플라스틱까지 플라스틱은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세상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플라스틱은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과거에는 매립하거나 소각했지만 환경오염 때문에 매립지나 소각시설 설치 장소가 마땅치 않아졌다. 선진국은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 폐플라스틱 폐기물을 판매하는 식의 임시방편을 채택했지만 그나마도 불가능해졌다. 2021년 바젤협정 개정안이 발효되면서 폐플라스틱의 국경 이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산업에서 생산이 아닌 처리기술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제 생산능력만 따로 떼어 바라보는 합리성의 세계는 사라지고 있다. 환경과 공존할 수 있어야 진짜 합리적인 경쟁력으로 인정받는다. 기업 경영에서도 환경과 사회에 대한 책임 그리고 지배의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ESG경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공공시장이 총체적 변화의 방향을 설정해야

기준이 바뀌었으니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전 방위적 변화를 관통하는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10월 28일 탄소중립을 공식 선언하고, 12월에 ​​2050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할 추진전략을 공개했다. 경제구조를 저탄소화하고, 신유망 저탄소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탄소중립 사회로 공정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2021년 8월에는 탄소기본법을 입법해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40% 줄이는 목표를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기반이기 때문에 탄소배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0%의 목표 실현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획기적인 친환경 신제품과 신기술을 내놓아도 민간시장에서 흡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제품과 기술은 초기 불편을 감수해야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중소기업에서 개발한 신제품과 신기술은 실증하면서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신제품과 신기술은 민간에서 실증하는 것부터 버겁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조달의 구매력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국가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조달청은 지난해 환경부와 혁신조달 수요발굴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공공조달의 구매력을 활용해서 탄소중립 이행과 환경문제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2020년까지 민간기업이 혁신제품을 신청하면 정부가 이를 심사해서 구매했다. 공급자 방식으로 조달 시스템을 운영한 것이다. 그런데 2021년부터 정부에서 환경문제, 탄소중립 이행 방법 등의 문제를 제시하면, 기업이 해법을 내놓도록 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을 구매하는 수요자 중심의 조달 방식을 추가한 것이다. 조달청과 환경부는 탄소중립과 자원순환, 물순환을 환경난제로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는 혁신제품 발굴에 나섰다. 혁신제품은 혁신조달 시스템을 통해 공공에서 구매한다.

대량생산이 아닌 환경과 공존하는 산업으로의 전환을 위해 대한민국의 정부와 공공기관은 혁신조달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혁신조달을 통해 공공시장에 진입한 친환경 제품과 기술은 매우 다양하다. 플라스틱은 분해되지 않는 특성 때문에 용도가 다한 후에 처리가 곤란하다. 민영제지는 플라스틱 빨대를 대체하는 친환경 종이빨대로 조달시장에 참여했다. 민영제지의 종이빨대는 인체에 무해한 접착제와 원지를 사용해서 친환경적이고 내구성도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에코크레이션의 저온열분해기술은 폐플라스틱을 친환경적으로 처리해준다. 플라스틱 가운데 비닐류는 재활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에코크레이션은 독자적인 촉매기술을 개발해서 비닐류를 열분해하며, 산업용 연료로 활용할 수 있는 기름까지 추출한다. 플라스틱 문제 해결에는 공공기관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전 서구청 자원활용과는 인공지능 플라스틱 분리배출기를 도입하고 유가보상제도를 실시했다. 지자체 차원의 신제품 도입과 제도 개선으로 분리배출 효과를 높인 것이다.

혁신조달은 신재생에너지 분야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에스테크의 화재 예방 및 차단기능을 활용한 지능형 태양광발전장치, 에이피에너지의 콘크리트 부력체 기반 수상태양광 발전시스템, 휴그린파워의 고체 수소저장물질 연료카트리지 형태 수소발전기, 테크온의 ESS(에너지 저장 시스템) 정밀진단이 가능한 배터리 품질분석기, 리셋컴퍼니의 태양광패널 무인청소로봇, 해라이트의 도난방지 및 방범기능이 탑재된 스마트 태양광 LED 가로등 등이 모두 신재생에너지와 관련된 혁신제품이다.

리셋컴퍼니의 태양광패널 무인청소로봇을 예로 들면 조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태양광발전에서 집광판의 청결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태양광 집광판이 더러워지면 발전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간에서 태양광패널 무인청소로봇을 선제적으로 구매하긴 쉽지 않다. 신재생에너지산업 자체가 아직 완성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양광패널 무인청소로봇은 태양광 발전 시스템과 상생협력하며 동반 발전하는 아이템이다. 공공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신재생에너지 산업의 인프라 확대는 요원한 일이다.

산업구조가 재편하면서 주목받는 기술 가운데 하나로 디지털 전환을 들 수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에서는 업무에 디지털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을 디지털 전환으로 이해했다. 전사적 자원관리(ERP) 시스템과 클라우드 시스템 도입, 공장 자동화 등이 대표적이다. 앞서 언급했듯 디지털은 서로 다른 영역을 이진법의 숫자로 통합 관리하도록 해준다. 전통 업무에 디지털 시스템이 도입되면 부서와 부문간 통합효과가 발생하면서 업무 효율이 향상된다. 하지만 최근 부상하는 디지털 전환의 핵심은 서로 다른 산업의 데이터를 통합 관리하는 것이다.

디지털 트윈은 최근 산업계의 핵심 화두 가운데 하나다. GE와 지멘스가 디지털 트윈 분야의 대표주자다. 1878년 에디슨의 전기조명회사를 모태로 태어난 GE는 20세기의 대표적인 가전 기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쳐왔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자 금융, 가전, 미디어 부문에서 철수하고 엔진사업에 집중했다. GE는 디지털 사업부문을 신설하고 데이터와 딥러닝 분야의 전문가 1,500명을 영입했다. 그리고 가상엔진을 설계해서 현실의 엔진과 똑같이 작동하게 했다. 가상엔진이 제공하는 데이터는 실제 엔진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예측해서 해결할 수 있게 한다. 디지털 트윈 기술은 데이터 시뮬레이션 플랫폼이다. 과거에는 오직 생산력이 경쟁력이었다. 지속적으로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제품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 기술은 디지털 영역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활용하면서 유지관리에서 수익을 창출한다. 제품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에서 자유롭다.

흥미롭게도 GE와 지멘스는 지난 세기 공공조달 시스템을 통해서 성장한 미국과 유럽의 대표 기업이다. 21세기, 이들의 디지털 전환 과정에도 국가적 지원은 이어진다. 국가경쟁력과 직결되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혁신조달이 새로운 산업 환경 전환에 의미있는 역할을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분야에서의 조달 실적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2021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용역 중심에서 조달제품 구매 위주로 전환하는 소프트웨어 생태계 혁신전략을 발표했다. 혁신조달은 앞으로 산업 생태계의 디지털 전환에도 큰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