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이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변화에 적응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에 앞장서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산업혁명이란 생산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 획기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산업구조도 혁명적으로 뒤바뀐다. 4차산업혁명의 핵심은 고도화한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전환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과거에는 뒤섞일 수 없던 기술들을 융·복합하면서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2차산업혁명의 연장된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다. 2차산업혁명은 세상을 시장 중심으로 바꿔놓았다. 그 이전에도 물론 시장은 존재했지만 일상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귀족처럼 경제력을 갖춘 이들은 시장에 가는 대신 장인을 불러서 옷을 맞춰 입었다. 일반인은 (시장에서 옷감을 구입하더라도) 직접 옷을 지어 공임을 아꼈다. 2차산업혁명에 의해 폭발적으로 증대된 생산력은 시장의 기능을 키웠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옷을 샀고, 역사상 처음으로 의복의 빈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시장은 더 싸고 좋은 옷을 공급해줬다. 대량생산은 사람들의 일상을 바꿔놓았다. 소비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고, 전통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신분 즉 소비자가 중요하게 부상했다.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공급자들은 의복에 더 가볍거나 따뜻한 기능을 개발하고 다양한 장식적 요소를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헤게모니는 공급자가 쥐고 있었다. 공급자가 소비자에게 제공한 (기능과 장식의) 이익은 전통적인 장인들의 특·장점을 도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복이 아닌 서비스나 복잡한 기계장치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뛰어난 공급자는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이들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감각적인 디자이너가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를 론칭 하고, 솜씨 좋은 요리사가 식당 체인점을 열고, 우수한 엔지니어가 기술창업을 하는 식이었다. 공급자의 핵심역량을 바탕으로 사업 영역을 정해서 시장에 진출하고, 이들의 능력을 검증받는 곳이 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은 공급자 중심의 대량생산 시대에 막을 내리고 있다. 전통적인 공급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무너지고 있다. 21세기 들어 크게 성장한 기업으로 우버와 에어 B&B, 아마존, 넷플릭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공급자의 핵심역량을 기반으로 태어난 기업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고,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해소하는 식으로 성장한 기업들이다.
의복의 기본 기능은 추위와 상해로부터 인체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제 생산기술은 기본 기능을 해소하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사람들은 옷을 사면서 환경오염을 회피하길 원한다. 음식을 사면서 맛이나 영양뿐만 아니라 기업의 윤리 수준을 확인하려 한다. 기존의 산업혁명의 핵심이 생산력 증대를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스템 구축이라면, 4차산업혁명의 핵심은 소비자 선택에 의한 생산과 소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시장은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소비자의 욕구는 다양하고, 여기에 부응하는 방식도 무궁무진하다. 다품목 소량생산의 스마트팩토리 기술을 구축해서 소비자가 원하는 디자인의 상품을 내놓을 수도 있고, 공익실현에 기여하는 상품을 개발할 수도 있다. 시장이 바뀌는 만큼 상품도 달라진다. 서비스도 중요한 상품 가운데 하나다. 한여름에 커피를 마시려고 한다면 원두의 질뿐만 아니라 커피숍의 냉방 수준도 고려대상이 된다. 4차산업혁명의 기술발전은 커피숍뿐만 아니라 냉방시설을 가동하지 않는 도로 위의 온도저감도 가능하게 해준다. 더 나은 도시시설 구축, 더 안전한 치안서비스 확보, 지속가능한 환경 구축이 이제 중요한 서비스 품목이 된다. 이제 소비자 중심의 시장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이란 어떤 것인지 찾아내는 능력이 가장 중요해지고 있다.
혁신조달의 혁신제품은 단순히 전통적인 상품의 품질을 개선한 것이 아니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요구되는 혁신성과 공공성을 갖춘 상품이 혁신제품이고, 공공에서 이러한 제품을 선제적으로 도입해서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 혁신조달의 임무다. 그렇다면 4차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혁신적이고 공공성 있는 제품 또는 서비스란 어떤 것일까?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확한 질문을 내는 출제능력이 바로 4차산업혁명시대 경쟁력의 핵심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4차산업혁명 시대에는 전문가의 핵심역량보다 현재 환경에서 필요한 문제 발굴이 가장 중요하다. 문제 발굴은 국민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에서 출발할 수도 있고, 정부정책의 성공적인 실현을 위한 고민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혁신조달전문지원센터의 혁신수요 인큐베이팅 사업은 4차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출제능력을 확보하려는 국가 차원의 시도다. 해외에서도 시민의 혁신적인 문제 발굴 능력을 확보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의 Challenge.gov와 영국의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NESTA)의 경진대회가 대표적이다.
2010년 미국의 멕시코만에서는 영국 석유회사의 원유시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매일 1만 배럴 이상의 원유가 해양을 오염시켰고, 인근 지역의 수산업은 완전히 파괴될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미국 정부는 원유를 분해하기 위해 화학약품을 대량 살포했지만 문제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화학약품에 의해 잘게 쪼개진 원유 입자는 화학약품과 결합했다. 무거워진 원유 입자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바다 안쪽에서 보이지 않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복구는 계속 진행 중이다. 오바마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시민의 적극적인 아이디어 공모에 나섰다. 이런 배경에서 미국의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위한 온라인 플랫폼인 Challenge.gov가 태어났다. 연방정부의 중앙조달기관인 연방조달청(General Service Administration, GSA)과 기술변환서비스국(Technology Transformation Services, TTS)이 운영하고, 에너지부, NASA, 보건복지부, 국방부 등 100여개 기관이 참여한다.
Challenge.gov는 홈페이지에 정부기관의 다양한 사업을 공개하고,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 해결해야 할 도전과제를 제시한다. 시민은 토론과 검증 과정을 통해 도전과제의 수준을 구체화한다. 도전과제를 해결하면 포상이 제공되는데, 과제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상금은 최대 수억 원에 이른다. 2017년에는 NASA에서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인의 배변 처리문제를 도전과제로 제시했는데, 가정의학과 의사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포상을 받게 되었다. NASA는 의사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몇 년간의 연구개발을 진행해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집짓기 디자인, 데이터 분석을 통한 농업기술 발전방향의 시각화 등 1,000건 이상의 도전과제가 Challenge.gov를 통해 성과를 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Challenge.gov는 내일의 마스크 공모도 진행했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도 갑갑하지 않고 안경의 김서림을 최소화하는 마스크를 시민 아이디어로 개발해서 코로나19와 이후 유행할 수 있는 감염병에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이 과제에는 50만 달러의 포상금이 걸렸다.
지금까지 Challenge의 포상금 지급 규모는 누적 3,000억 원을 넘었다. 시민사회의 참여 열기가 뜨겁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Challenge.gov는 각종 경진대회 운영과 지식공동체의 관리·운영, 양방향 교육 진행 등 지식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고급 인프라 구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Challenge.gov는 다양한 난이도의 과제를 제시하고, 기존의 수상정보를 공개하는 등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영국의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NESTA)은 1998년에 설립되었다. 당시 영국은 제조업의 몰락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영국이 자랑하던 롤스로이스가 BMW와 폭스바겐그룹에 분해되어 매각된 사건은 당시 상황의 상징적인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상원의원인 데이비드 퍼트남 남작은 과학과 예술을 섞어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자고 의회에 제안했다. 이를 위한 전담기관으로 세워진 곳이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NESTA)이다. “산업혁명의 영광이 퇴락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혁신과 창조의 전통뿐”이라는 퍼트남 남작의 연설은 혁신기관인 NESTA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영국은 산업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산업의 몰락도 앞서서 경험했다. 대규모 생산능력을 개발한 산업혁명의 주도자였다가 미국과 아시아에 세계 공장 역할을 빼앗겼고, 금융 산업의 중심지도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했다. NESTA는 혁신과 아이디어가 새로운 산업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창조산업을 통해 영국의 재도약을 이끌겠다며 NESTA는 ‘혁신으로 넘쳐 흐르게 하라’는 구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예술과 과학, 기업의 융합을 추진했다. 전통적으로 창조산업은 광고·방송·출판 등의 미디어산업을 가리켰는데, NESTA는 이들의 창조성을 건설업이나 제조업에 확대·적용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세계적인 자동차·전자·통신회사의 디자인센터가 영국에 세워졌고, 현재 영국 런던의 사회인 가운데 1/5이 창조산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NESTA는 경제성장률처럼 국가혁신지수를 수치화하고 혁신의 전문기관으로 발전해갔다. NESTA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혁신의 진원으로 꼽힌다. 유럽연합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 6개의 사회혁신기관이 참여하는 디지털사회혁신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NESTA가 총괄 연구기관의 역할을 맡았다. NESTA의 위상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NESTA는 전 세계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 지식의 허브로 발돋움하기 위해 100만 파운드의 상금을 걸고 세계적인 혁신경진대회인 NESTA 챌린지를 시작했다. NESTA는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실사구시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 그래서 이론 중심 연구 활동보다는 현장 중심의 최초이자 최선의 솔루션을 찾는 데 주력한다. 좋은 아이디어의 제공자에게는 포상금도 지급되지만, 혁신스킬 개발과 역량향상 지원프로그램도 지원한다. 혁신가의 육성을 위한 시도다.
NESTA는 지금까지 30개 이상의 상을 개발하고 각종 경연대회를 운영하면서 1,700만 파운드 이상을 지급했다. 이 과정에서 7,000명 이상의 혁신가를 끌어들이는 성과도 냈다. 최근 많은 관심이 모인 경연대회로는 180만 파운드의 총 상금이 걸린 아프리카 플라스틱 챌린지를 들 수 있다. NESTA는 챌린지를 통해 사하라사막 아래의 아프리카 지역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가 개선되길 기대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매년 발생하는 플라스틱 폐기물은 7,700만 톤이 이르는데 재활용률은 12% 안팎에 불과하다. NESTA는 문제 해결을 위해 네 가지 중점영역을 설정했다. 쓰레기 저감, 플라스틱 폐기물 분리배출, 재사용 가능 옵션 선택, 1회용 플라스틱 사용 안 하기가 그것이다. 챌린지 참여자는 중점영역의 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사회 여성의 역할 강화를 위한 도구·정책·캠페인 개발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심사를 통해 30명의 준결승 진출자를 선정하고 포상한 후, 아이디어를 다시 구체화하여 15명의 결승 진출팀을 다시 선별한다. 3개의 최종 우승팀은 2023년에 가려진다. NESTA 챌린지는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구체화하여 현실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루어진다.
NESTA의 경진대회는 문제의 적합성을 고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대로 된 문제 제기에서 최고의 솔루션이 나오기 때문이다. NESTA가 추구하는 것은 혁신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 제기가 명확해야 하기 때문에 NESTA는 문제가 모호하지 않고 분명한지 논의한다. 또한, 현실을 고려하여 혁신을 낳을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래서 사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할 만한 명분이 있는 문제인지, 실현가능한 예산과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지 따진다. 추가적인 펀딩이나 연관 지원을 통해 솔루션 추진을 가속화하거나 솔루션의 확대 적용을 고려할 수 있는 문제인지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경진대회 포상을 통한 사회적 효과도 고려하며 그동안 도외시되었더라도 시상을 통해 전반적인 인식 개선을 도모할 수 있는 문제라면 NESTA는 좋은 평가를 내린다. 이렇게 선정된 솔루션이 향후 관련시장의 활성화에 충분히 이바지할 수 있는 문제인지를 고려하여 NESTA는 과제를 선정한다.
Challenge.gov와 NESTA 챌린지 이외에도 시민사회의 참여는 혁신의 원동력이 된다. 세계 각국의 정부는 시민사회의 참여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2010년 영국 법무부는 사회적 투자전문기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에서 운영하는 교도소의 단기 재소자 재범률 감소방안의 공모를 진행했다. 그 결과 영국의 교도소 재범률이 11% 늘어나는 상황에서 피터버리 시 교도소는 재범률을 12% 낮추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세계는 대량생산과 소비의 시대를 거쳐 다음 단계로 전환하고 있다. 혁신은 다가올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고, 더 나은 솔루션을 찾는 국가와 기업이 미래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혁신은 올바른 문제 제기 능력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혁신조달전문지원센터가 혁신수요 인큐베이팅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혁신수요 인큐베이팅 사업은 두 개의 트랙으로 이루어진다. 일반 국민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전문가 참여로 구체화하는 것이 하나고, 정부부처와 지자체 그리고 공공기관에서 공공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제출한 과제의 해결방안을 기업에서 찾는 것이 하나다. 두 가지 시도 모두 기업이나 시장에서 내놓은 솔루션을 수요자가 소비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선 것이다. 수요자 중심의 문제 제기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NESTA의 예에서 보았듯 가장 좋은 솔루션은 정확한 문제인식에서 시작된다. 시민과 공공의 적극적인 노력과 참여가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과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