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조달합니다_전문가 인터뷰

혁신지향 공공조달을
대한민국 혁신의 촉매로

정부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필요하다. 어차피 집행해야 하는 예산이라면 국가의 기술력을 높이고 공공서비스를 강화하는 방향에 투입하자는 취지에서 혁신조달 정책이 만들어졌다. 혁신조달 정책은 점차 확산되며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아직도 혁신조달이란 무엇인지 어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겨우 시행 3년째가 된,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 낯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정책 설립 과정에서 직접 역할을 수행한 부경호 교수를 만나 혁신조달이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혁신은 민간 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부경호 교수의 경력은 화려하다. 삼성전자에서 차세대 반도체 공정을 개발하는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미국 국립연구원에서 해외 경험도 쌓았다. 특허청 특허심사관으로 8년간 재직했고, 국가지식재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지식재산정책 관련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변리사 자격증도 갖춘 그는 올해 문을 여는 한국에너지공과대학에서 지식재산 분야를 강의할 예정이다.

먼저 부경호 교수에게 혁신지향 공공조달 정책 추진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물었다.

“2018년 하반기부터 기획하여 2019년 본격 추진된 본 정책은, 검증된 기성제품의 경쟁입찰 방식에 기반한 기존의 조달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어서, 각 부처에 혁신지향 공공조달 정책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구체적이면서 실증적인 정책 실행 방안들을 만드는 등 실무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부경호 교수는 곧장 혁신지향 공공조달 정책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혁신지향 공공조달 정책을 이야기하려면 공공조달에 혁신을 도입하는 이유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공공조달은 대부분 입찰공고를 내고 경쟁 입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경쟁을 하려면 이미 존재하는 제품을 구매해야 합니다. 물론 기존 제품도 계속 개선되긴 하지만 완전히 달라지진 않습니다. 같은 솔루션 안에서 좀 더 효율적으로만 바뀌는 겁니다. 공공시장에서 새로운 혁신 솔루션을 도입하긴 쉽지 않습니다. 경쟁 입찰을 원칙으로 하는 공공조달에서 혁신을 도입한다는 건 모순적이기도 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 부처에 혁신조달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물었습니다. 민간은 혁신을 도입하지 않으면 기업이 망합니다. 그런데 정부에선 혁신을 구매하면 담당자의 모가지가 날아갑니다. 왜 검증되지 않은 걸 구매하느냐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물론 국가나 정부기관은 안정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공공조달의 막대한 재원에서 일부만이라도 혁신에 할애하는 건 가능하지 않겠는가? 아주 일부 예산을 떼어 혁신을 시도하고, 성공적인 혁신이 확산되도록 지원하는 정책을 만들자고 이야기했습니다.”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기업이 오히려 혁신의 주체로 적합하지 않느냐고 묻자 부경호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적으로는 혁신성장을 민간이 주도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혁신성장을 촉진시키는 역할도 중요합니다. 정부가 혁신성장의 촉매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기획재정부 관료들과 테스크포스를 만들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습니다. 참고할 만한 전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사해보니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좋은 사례가 있었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관리 구역은 넓고 험합니다. 관리의 사각지대와 위험지대가 존재하는데, 상시순찰 인력을 배치하기 어렵습니다. 조난자가 발생하면 수색이 쉽지 않고, 날씨까지 안 좋으면 더욱 위험해집니다. 실제로 빗속에 수색하다가 공단 직원이 실족사한 사례도 있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드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드론을 구입하기로 하고 어떤 사양이 필요한지 2016년 7~8월 2개월간 수요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세 가지 기능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안내방송을 할 수 있고, 현장 상황을 촬영해서 중앙의 공단 상황실로 전송할 수 있어야 하고, 정지비행이 가능해야 했습니다. 실종자를 수색하고 의사소통하려면 당연한 기능들이죠. 그래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이 세 가지 기능을 갖춘 드론을 구입하려고 노력했지만 연말까지 찾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드론 심포지엄과 드론활성화 컨퍼런스와 드론쇼코리아에 참석해서 상담하고, 드론산업진흥협의회에도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결국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아주 과감하게 나섰습니다. 이런 기능을 갖춘 드론을 개발하면 직접 실증해서 구매하겠다고 한 거죠. 2018년 7월부터 11월까지 10개 국립공원에서 13개 기종으로 12회에 걸쳐 테스트베드를 진행한 후 원하던 드론을 도입했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정책 수립 전에 적극행정으로 혁신조달이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필요한 스펙을 정확하게 제시해서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드론을 도입해서 더 빨리 더 넓은 범위에서 실종자를 수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어들어 예산절감 효과도 생겼습니다.”

부경호 교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새로운 드론을 구입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혁신지향 공공조달은 혁신제품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혁신적인 서비스를 국민에게 조달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적극행정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공공기관 담당자가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긴 쉽지 않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문책될 테니까요. 민간에선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을 구매해야 합니다. 그게 기업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니까요. 그런데 공공에선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을 구매하는 것이, 구매 담당자의 생존 문제가 됩니다. 혁신적인 드론을 구입해서 국립공원관리공단 서비스에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드론에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혁신은 리스크 테이킹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거죠. 그런데 담당자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혁신지향 공공조달 정책은, 면책을 부여하고 인센티브를 강화하여 공공 영역에서 적극 행정에 나서도록 하자는 겁니다. 개인은 물론 공공기관을 평가할 때도 혁신구매 실적을 반영해서 혁신지향 공공조달을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인 거죠.“

수요주도형 혁신으로 성장동력을 마련한다

부경호 교수는 혁신이 기술주도형과 수요주도형의 두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합니다. 좋은 기술을 개발해서 제품에 적용하면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기업은 기술개발에 나섭니다. 이렇게 나오는 혁신을 기술주도형 혁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혁신이 테크놀로지-푸시(Technology Push)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수요견인(Demand Pull) 방식의 혁신도 있습니다. 실리콘 밸리는 수요견인 방식으로 태어난 혁신의 요람입니다. 과거 냉전 시기,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경악했습니다. 핵탄두 장착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미 본토가 선제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가 스푸트니크 쇼크입니다. 미국 국방부는 미사일 분야의 기술격차를 줄이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한편, 핵미사일 공격을 받았을 때 대응할 수 있도록 적국(소련)의 영토를 마하 3으로 논스톱 횡단할 수 있는 핵무장 폭격기 B-70의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미국 국방성의 요청을 받고 IBM의 군수산업 부서에서 이 폭격기에 사용될 부품의 도전적 사양을 제시합니다. 초음속 폭격기의 항법장치에 컴퓨터 기술을 적용하려고 하기 위해 고온에서 안정적으로 동작하면서 빠른 전환속도를 내는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라는 것이었죠. 젊은 과학자 8인이 캘리포니아에 설립한지 3개월밖에 안 된 스타트업 페어차일드반도체가 유일하게 요구사항을 맞춰보겠다고 나섰습니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게르마늄 대신 실리콘으로 반도체를 만들어 보겠다고 설립한 햇병아리 회사로 납품실적도 없었습니다. 페어차일드의 노이스는 IBM 구매담당자와 기술 협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시장에 없던 사양의 트랜지스터 100개를 납품하기로 협의했습니다.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신기술은 미국의 방위력을 크게 개선했고, 이후 아폴로 달탐사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핵심 경쟁력이 됩니다. 페어차일드반도체도 크게 성장했습니다. 페어차일드반도체 주변 샌프란시스코 만 지역은 실리콘반도체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게 실리콘 밸리입니다.”

페어차일드반도체의 개발팀장인 고든 무어는 노이스와 함께 훗날 인텔을 창업했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지금도 많은 민간기업들이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출발점에 미국 정부의 수요견인형 혁신조달이 존재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경호 교수는 노트북을 돌려 거북선 관련 기록을 띄운 화면을 보여줬다.

  1. 음력 2월 8일(양력 3월 21일), 맑다가 또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이날 거북선의 돛으로 쓸 베 29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는데, 조이립과 변존서가 자웅을 다투다가 조이립이 이기지 못했다. 우후가 방답에서 돌아와 방답첨사가 방비에 온 정성을 다하더라고 매우 칭찬했다. 동헌 뜰에 돌기둥 화대를 세웠다.
  2. 음력 3월 27일(양력 5월 8일) 맑고 바람조차 없었다.
    아침을 일찍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포에 이르러 쇠사슬을 가로질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나무기둥 세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3. 음력 4월 12일(양력 5월 22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 현자 포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관아로 올라가면서 말을 타고 내일 때 딛는 돌을 보았다.
    - 난중일기, 亂中日記, 돌베게(2016) 발췌
  4. 신(臣)이 일찍이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
    - <당포파왜병장> 당항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 올린 장계의 일부

“우리나라에도 혁신 조달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그것입니다. <난중일기>에서 거북선이 나오는 첫 대목에는 사용할 자재를 조달하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 두 대목에선 거북선에서의 포격을 실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첨단 무기였던 지자와 현자 두 대포를 해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 실사한 바로 다음날인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거북선은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거북선은 일본군의 해상 보급을 차단했고,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혁신이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혁신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혁신지향 공공조달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면책을 허용해야 할까?

“혁신적이라고 판단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실패 사례도 분명히 나올 겁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혁신은 위험을 감수하는 리스크 테이킹이니까요. 하지만 혁신지향 공공조달에 투입하는 예산은 전체 조달 예산의 극히 일부입니다. 실패의 범위가 제한적이죠. 또, 그럴싸해 보인다고 국가예산을 함부로 사용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혁신 제품을 구입하는 만큼 R&D와 연계하고 실증해서 미리 확인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꾸준한 연구개발과 실증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도 「조달연계 R&D 지원사업」을 활성화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조달연계 R&D 사업」의 용어에서 ‘R&D’ 보다 ‘조달 연계’를 먼저 둔 것은 수요견인 방식을 강조한 것입니다. 국가 R&D 결과물에 실증을 추가하여 조달할 수 있도록 완성시키는 R&D 개념이 아닙니다. 미국방성에서 제시한 도전적 사양이 실리콘 밸리를 탄생시킨 것처럼, 정부가 제대로 도전적 사양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본 정책이 개발되기 이전인, 2018년 5월 대한민국 혁신성장 보고대회 모두발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도 공공조달에서 혁신벤처기업 제품을 우대하는 제도가 있지만 더 많은 새로운 공공수요를 발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와 공공부문에서 혁신제품의 초기 판로를 열어주는 공공수요를 과감하게 발굴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https://www1.president.go.kr/articles/3418).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공공수요에 기반한 실증형 R&D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각 부처 산하 진흥원의 사업공고 또는 혁신장터에서 통합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혁신지향 공공조달에서 태어난 K-방역 신드롬

부경호 교수는 코로나의 전 세계적 확산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선방할 수 있던 데에는 질병관리본부의 선제 대응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2019년 12월 27일, 중국 후베이성의 한 의사가 중국 보건당국에 새로운 감염 질병 가능성이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나흘 후 중국 정부는 세계보건기구에 이 사실을 통보합니다. 후베이성 우한에서 정체불명의 폐렴이 돌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에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가 코로나 검사법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1월 27일에 역사적인 서울역 회의가 열립니다. 관계업체를 모두 불러놓고 이런 사양의 진단 방법을 개발해오면 정부가 진단키트를 구입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사전사용승인제도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요구한 스펙은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검사의 정확도를 높여야 하니 2개 이상의 유전자를 매칭해야 한다. 신속해야 하니 6시간 안에 검사결과가 나와야 한다. 검사 결과는 민간 검사기관 3곳에서 교차 평가해서 신뢰도를 확보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조치가 코로나의 세계적 대유행 이전에 긴급하게 이루어졌습니다. 2020년 2월 4일, 코젠바이오텍의 PCR진단키트에 대한 긴급사용 승인이 났습니다. 기존 제도대로라면 80일이 소요되는 승인기간을 7일로 단축해서 승인 허가를 낸 거죠. 세계보건기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명칭을 COVID-19로 정한 2월 11일부터 1주일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서울역회의 당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부경호 교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부정적인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선진국의 기술을 따르지 않고 만드는 진단 키트의 정확도를 의심하기도 했고, 과도한 조치라고도 했습니다. 우려하는 입장에도 타당한 이유는 있습니다. 위험하다는 거죠. 하지만 혁신지향은 리스크 테이킹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도전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코로나 대유행 속에서 우리나라가 선방하고, K-방역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 겁니다. 덕택에 대한민국의 의료기기 산업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높아지고, 수출도 급격히 증가할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혁신지향 공공조달 사례 하나가 국격을 높이고, 산업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진단키트를 만든 건 민간기업입니다. 혁신성장은 결국 민간기업이 주도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서울역회의에서 초기 시장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기업이 손해를 감수하고 진단키트 개발에 나서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업의 혁신활동에만 의지해서 시장이 열리길 기대하는 건 국가의 적극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일입니다. 초기 시장을 열기 위해서는 공공부문 수요를 확대해서 정부가 적극적인 촉진 활동을 해야 합니다.“

혁신조달이 아니라 혁신지향 조달이다

“혁신지향 공공조달에서 실패의 위험성을 낮추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실증과 연구개발, 그리고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공 부문의 모든 구매 담당자들이 첨단 기술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국민에 대한 서비스를 향상하기 위해서 어떤 스펙이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조난자 구조를 위해 필요한 사양이 무엇인지 세 가지로 정확하게 정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해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사양을 정해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적극 행정이 필요합니다. 넓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혁신지향 공공조달의 사례는 ‘한글 창제 및 보급’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의편’에는 한글의 창제 이유가 나옵니다. 먼저 문제를 진단합니다. 한국어는 중국어와 다르므로 한자로는 제대로 표기하기 어렵고,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 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다는 거죠. 그래서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자’로 스펙을 설정하고, 일상생활에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 글자를 만든 겁니다. 장기간의 연구개발 끝에 창제한 해는 1443년, 세종26년입니다. 하지만 1446년 9월까지 충분히 실증한 후 반포했습니다. 세종은 1450년 52세에 사망하는데, 창제한 후에도 노환 속에서 3년간 실제 궁중에서 한글을 직접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듬었습니다. 이게 실증입니다. 그리고 궁중에서 확인한 혁신을 일반에게 확산시키기 위해 ‘훈민정 해례본’이라는 매뉴얼을 만들어 확산의 어려움을 돌파했습니다. 훈민정음은 열정과 끈기로 적극행정을 추진해서 공공 서비스를 혁신한 결과물입니다. 훈민정음의 사례에서 혁신지향 공공조달의 향후 정책적 발전 과제인 확산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경호 교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혁신에 나서는 건 불가능하다고도 인정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공공시설 관리 직원들이 혁신적인 대안을 고민할 필요는 없고, 도전의 일부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예처럼 하나의 혁신 사례가 성공하면, 그 성공은 다른 모든 공공시설로 확산될 수 있다. 확산된 혁신은 대한민국 미래 성장의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혁신조달이 아니라 혁신지향이라고 한 것은 완성되고 확인된 혁신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서비스의 혁신과 기업의 기술혁신을 지향한다는 뜻입니다. 위험을 국가가 부담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향’을 넣은 것입니다. 그러한 취지로 조달사업법 개정시「조달의 날」도 입법화하였습니다. 실패할 수 있는 구매도 혁신지향 공공조달입니다.